전사사회에서 살인을 거부하는 데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필 베리건 - 평화운동가, 성직자
내 아버지 딕 웨어햄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받으며 자라났다. 1930년대 브레드런 교회에서 성장한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로부터 다른 쪽 뺨을 돌려대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나중에 아버지가 병역의무를 이행할 나이가 되었을 때에는 어렸을 때 배운 평화 교육과 예수에 대한 강한 믿음이 아버지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신청을 하도록 했다. 아버지의 말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1942년 12월, 열여덟살이 된 나는 병무청에 등록해야만 했다. 지난 몇 년간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교회 활동과 특히 교회에서 주최했던 수련회 경험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게 산상수훈과 십계명의 가르침은 전쟁참여에 반대하는 양심을 가지게 할 만큼 명확했다. 전쟁은 예수님이 기독교인에게 바라는게 아니었다. 이 일로, 많은 어려움이 내게 닥쳐왔다.
우리 가족은 나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 갔는데 다행히 그 분은 나를 지지하고 도와주셨다. 후에 그 목사님은 나와 또 다른 한 명, 바로 자신 아들의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목사직을 잃게 되었다. 그 당시 징용 연령에 해당했던 사십여명의 우리 교회 청년들 중에 브레드런 교회의 역사적 입장을 취한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가까웠던 친구들은 모두 병역 등록을 했고, 다음 1년 반에 걸쳐 군대로 보내졌다.
Doug Driediger의 벽화, 1995, 캘거리 알버타 캐나다. Toni Reed 사진(출처: Unsplash ).
나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신청했으나, 지역 위원회로부터 거부당했다. 항소를 했고, 위원회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들이 질문을 퍼부어댈 때, 거기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그 날이 오기까지 성경을 많이 읽으며 내가 CO(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의 영어약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대답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 날은 결코 잊지 못할 오후였다. 한 시간 이상이 지나서야 마침내 조사에서 풀려났고 며칠 안에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의 질문은내게 희망을 주지 않았고,기다림은 몇 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얼마 뒤, 내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로 인정되었다는 통지서가 도착했다.
대학에서 집으로 돌아오자 마틴스버그 지역에 있던 친구들은 즉각적으로 나를 냉담하게 대했다. 친구들 중 몇 명은 전장에서 죽었고, 한 두 명은 꽤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교회에서 내가 누군가의 옆자리에 앉으면 그 사람은 자리를 옮겨 앉았다. 가게에 가려고 거리를 걸어가면 사람들은 길 건너 반대편 거리로 걸어갔다. 친하게 지냈던 여러 친구들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고, 다른 이들은 나를 비전투요원이나 군목으로 만들어 전쟁을 지지하게 하려고 시도했다. 내 가족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나 괴로운 일이어서 얼마 뒤부터 휴일을 제외하고 대부분 대학에 머물러 있었다.
대학이라고 별로 나을 것도 없었다. 총장은 특히 내 입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목회자였고 브레드런 교회의 전임 총회장이었으며 내가 공부하던 과의 학장이었다. 상황이 쉽지 않았다.
무저항, 평화주의, 평화실행의 개념은 그 후 완전히 개인적인 일로 전환되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는 목회자로 훈련 받고 있던 돈 포브스라는 또 한 명의 CO가 있었다. 징집이 전면적으로 시행되기 전인 1942년 가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그의 믿음과 신앙의 진면목을 목격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밤 대학에서 힘과 우월을 상징하는 축구선수들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당 밖에서 모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돈 포브스를 에워쌌다. 돈은 체격이 컸지만 비폭력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축구선수 중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와 그가 정말 CO 인가 물었다.
돈이 말했다. “그래, 그게 내가 믿는 바야.”
그러자 다른 한 명이 몸을 뒤로 빼더니 온 힘을 다해 돈의 얼굴을 강타했고, 돈은 코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고, 공포에 질려 완전히 얼어붙었다.
다시 처음의 그 축구선수가 물었다. “좋아, 포브스, 너 아직도 CO냐?”
돈은 천천히 일어서서 말했다. “이런게 예수의 길과 가르침에 대한 내 믿음을 바꾸진 못해. 나는 여전히 CO야.”
그러자 그 선수는 다시 돈의 얼굴을 쳤고, 돈은 엄청난 고통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돈은 다시 천천히 일어나 공격자에게 말했다. “너를 용서할게.”
그 선수는 격노하며 다시 돈을 공격했지만, 다른 여러 선수들이 자기들의 폭력자를 붙들고 그의 방으로 데려갔다.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축구선수들과 학생들은 이 잔인한 광경에 경악했다. 나는 다른 학생 한 명과 함께 조심스럽게 돈을 부축하여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그의 방으로 데려갔다. 돈은 여러 날을 상처난 얼굴과 부운 눈, 두통을 겪으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돈은 대학과 신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내 친구였다. 그는 종종 우스갯소리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딕, 네가 좀 조용히 있고, 말만 너무 많이 하지 않으면 네 무식을 드러내는 일은 없을거야.”
내 아버지의 이야기를 생각할 때면, 그리스어 신약 학자이자 코이노니아 농장(Koinonia Farm) 설립자인 클라렌스 조던(Clarence Jordan)의 이 시가 떠오른다. 이 시를 읽으면 아버지가 아멘이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모든 경기가 끝이 나고,
역사의 마지막 장이 쓰여질 때,
시간의 장막이 걷히고,
하나님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실 때가 오면
그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려질 이는
전사가 아니라,
평화를 이룬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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