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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브루더호프에 합류한 이유

텍사스 도로의 갈림길에서

2021-07-02

damaged motorcycle helmet
사진 글쓴이 제공

뉴욕의 랑고네 메디컬 센터에서 일하는 이들은 이름을 알고 있다. "어서 와요 도널드... 그런데 도널드의 성이 뭐였지요?" 지난번 안과 예약 접수 직원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나를 알아봐 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들이 나를 알아보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지난 1 동안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녔기 때문이다. 기억은 불명확하지만, 어떻게 일이 시작되었는지 말해보도록 하겠다.

2019 12 , 텍사스의 미들랜드에서였다. 오직 나의 체온과 맥박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그것 외에 나는 거의 시체에 가까웠다. 모니터에는 신경 활동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고, 침상 곁에 모여있던 가족들은 필사적으로 나의 심장 박동에 매달렸다. 생명의 유일한 징후였기에.

경제적인 이유로 나는 오토바이를 샀다. 모험에 대한 갈증이 다른 동기였을 수도 있다고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랬다 하더라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토바이 단연코 가장 저렴한 개인 교통수단이었다. 1 동안 77달러의 보험료를 냈는데, 모아둔 영수증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연비로 따지면, 갤런당( 3.78리터) 평균 90km 달렸다. 전화기에 기록해 것을 살펴보면 그렇게 나온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텍사스주 파소에서는 오토바이가 생각할 것도 없이 가장 손쉬운 교통수단이었다.

스물한 , 내가 태어나서 자란 브루더호프를 의도적으로 떠났다. 날개를 펴고 나만의 세계를 항해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급진적인 기독교 공동체에서 자라났기에 특정한 가치관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기적인 생활 방식을 쫓으려고 떠난 것은 아니었고, 5년쯤 지나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막대한 재산을 모으는 것이 결코 나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2019 8 3, 맨하탄 포트 오소리티 터미날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짐가방을 싣고 텍사스로 떠났다.

처음에는 파소에 있는 피난민 보호소인 '어넌시에이션(수태고지) 하우스'에서 1 동안 자원봉사를 하려고 했다. 이전에 그곳에서 2주를 보낸 적이 있는데 일이 너무 좋았고 동료 자원봉사자들과 지속적인 우정을 쌓아 가고 있었다. 그러나 꼬박 1년을 봉사한다는 것은 '적은 비용으로 생존하기'라는 뜻이었다. 자원봉사라는 이름은 그럴듯했지만 일단 도착하자마자 자급자족이 중요해졌다. 브루더호프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하려고, 저축을 시작할 있는 번째 직업을 구했다.

무급 봉사로 인한 경제적 보장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원봉사에 대한 나의 비전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명되었다(제공된 수고료보다 많은 것이 필요했다). 값싼 노동력이 팽배하고 최저 임금마저 낮은 파소는 돈을 벌기 힘든 곳이었다. 낮에는 건설 공사 일을 하고, 밤에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했다. 멕시코에 있는 스페인어 학교에 가고 싶어 힘으로 벌어 학비를 내고 싶었지만, 돈이 필요했다. 나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 나의 최우선 순위가 되어버렸다.

텍사스의 미들랜드에 있는 석유 회사로부터 받았던 일자리 제안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추 회사가 나를 소위 "물 이동" 수습사원으로 고용했다는 것을 취업 정보 사이트 Indeed.com 서류가 확인시켜 준다. 미들랜드는 미국에서 가장 천연 석유 매장지인 텍사스의 퍼미안 분지에 있다. 유전의 일자리들은 '벼락부자'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오토바이 안장 가방에 싸서 2019 11 미들랜드로 달려갔다.

여기서부터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지점이다. 미들랜드와 오데사를 구분짓 척박하고 단조로운 풍경도, 번째 임시 거처로 삼은 에어비앤비도 기억나지 않는다. 동료들이나 직장에서 부과 받은 일이 어떤 일이었는지도 완전히 잊어버렸다. 지금부터 이야기는 경찰 보고서에 진술된 가족의 설명으로 대신한다.

최근에 친구 명이 텍사스의 미들랜드가 "자동차 사고의 세계 수도"라고 말해 주었다. 주민들이 "과도한 노동과 수면 부족,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라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앞으로 9m나 차를 들이댄 운전자도 분명히 그들 명이었을 것이다. 제한 속도가 시속 80km 4차선 교차로에서 우선 통행권은 내게 있었다. 나는 고가시성 형광 의류를 착용했고, 헬멧은 반사 테이프로 덮여 있었으며, 오토바이 전등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운전자는 전혀 나를 알아채지 못하고 정지 표지판을 지나 진로를 가로질러 진행해 들어왔다. 급정거로 미끄러진 타이어 자국이 9 되는 곳에서 오토바이는 시속 70km 속도로 차의 측면에 충돌했다. 나는 58 만에 깨어났다.

전화기는 충돌에서 살아남아 도로 가장자리로 튕겨 나갔다. 행인이 그걸 보고, 전화기를 집어서 내가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케빈이었다. " 전화기 주인을 아십니까?" 그가 물었다. " 사람이 방금 끔찍한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어요." 케빈의 심장이 멎었다. 형은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그가 살아있습니까?" 불과 며칠 , 우리는 파소에서 추수감사절을 함께 보냈었다. 순식간에 형은 결정을 내렸다. 모든 것을 팽개치고 뉴욕 리버헤드에 있는 형의 집을 떠나 텍사스로 있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라과디아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우리 부모님도 동행했다.

꼬박 3 동안 가족들은 오데사에 있는 메디컬 센터 병원의 침상 곁에 붙어 있었다. 나는 8 동안 혼수상태에서 삶과 죽음 사이를 맴돌았다. 부모님은 나의 임시 거처였던 에어비앤비에서 조그마한 케미모토 안장 가방 안에 있던 소지품들을 모두 풀었다. "우리는 가방을 풀면서 그저 울기만 했어."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내가 짐을 쌌던 방식을 자세히 설명했다. 꼼꼼하고, 정확하게. 이것만으로도 부모님은 성격을 아신다. 친한 친구가 나를 보러 병원에 들렀다. 침대 곁에 그는 그만 창백해져서 기운을 잃고 말았다. 형이 그에게 앉을 것을 권하고 잔을 가져다 주었다. 그 친구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너는 완전히 시체였어!"

traffic accident사진 글쓴이 제공

나는 14 동안 집중치료실에 있었다. 그런 다음 본원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서서히 나아졌다. 꼬박 달이 지난 , 의사들은 내가 뉴욕 해버스트로에 있는 헬렌 헤이스 재활 병원으로 옮겨질 준비가 되었다고 했으나 비행하기에는 안정적이지 못했다. 아버지와 삼촌은 유일한 대안인 RV(캠핑 차량) 택했다.

27시간 동안 RV 타고 뉴욕까지 가는 동안 나는 겉보기로는 조리 있게 말을 있었으나 여행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전문가들은 외상성 손상 인간의 뇌가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데는 신체의 다른 어느 곳보다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2020 1 중순, 나의 흐릿한 기억력이 드러났다. 헬렌 헤이스의 입원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방이 어렴풋이 보였고 인지 치료사가 나를 훈련시켰던 기억이 희미하게 났다. 치료사가 "지금 어디에 있지?" 하고 물으면 나는 "해버스트로, 뉴욕"이라고 대답했다. 그곳이 어딘지, 내가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지만 대답을 지시 받았고, 나는 말에 따랐다. 부모님께는 "어떻게 일이에요?"라고 끊임없이 물었고 부모님은 참을성 있게 사고 이야기를 반복해서 계속 들려주었다. 그럼에도, 악몽에서 언제 깨어날지 순간 궁금했다.

1 25, 부모님은 마침내 나를 집으로 데려가셨다. 헬렌 헤이스를 떠나는 내게 손을 흔들어 주던 병원 직원들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조그맣고 빨간 놀이 기차에 탄 팍스 힐 공동체의 유치원 아이들이 나의 귀가를 환영해 주던 일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면서 "언제 다시 제정신을 되찾을 수 있을까?"라고 자문했던 것도 기억난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안심이 되었다. 새로 자라나는 얼굴의 수염도 현실을 깨닫도록 도움을 주었다. 수염이 자라는 데는 하룻밤 이상 걸리는 걸 보니, 이건 악몽이 아니라 실재가 분명했다.

가족과 함께 집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팍스 힐 공동체를 거닐며 오랜 친구들과 이웃들을 다시 만났다. 병원 진료는 계속되었다. 난 한때 지녔던 외관을 복원하기 위한 쉽지 않은 수술들을 직면했다. 진료 예약은 뉴버그에서 뉴욕 시까지, 안면 수술과 구강 수술, 치료 운동까지 다양했다. 그것들에 압도당해야 했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랑스런 교회가 나를 받쳐주고 있었다. 교회는 날마다 영적, 실제적, 재정적인 내 삶의 모든 측면을 완벽하게 돌봐 주었다. 완전히 포옹당한 기분이었다.

2020 1 30, 나는 23살이 되었다. 삶이 지속되면서, 내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텍사스에서의 나의 장기적인 야망은 잊었다 - 기억도 나지 않는다 - 하지만 항상 언젠가 브루더호프에 합류하게 될 내 미래를 상상해 왔었다. 내가 세례를 받을 때, 기독교는 진정한 급진적 신앙이며, 모든 것을 공유하는 완전한 공동체가 기독교 신앙을 살아내는 가장 신실한 방법이라고 인정했다. 내 주변의 헌신적인 많은 구성원들을 보니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텍사스로 떠나기 전에 내 미래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이 한 번 있었는데, 같은 반 친구에게 왜 공동체에 합류하기로 했는지 물어보았다. "하나님이 그러라고 하셨어." 그가 대답했다. 나는 그의 결정을 존중했지만, 냉소를 피할 수 없었다. 내 생각에, 어떤 사람들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초자연적인 개입을 너무 성급하게 인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나 또한 지난 5개월의 의미를 무시할 수 없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기적적으로 보였다. 사고 후 CT 촬영한 내 두개골의 3D 영상을 보면서 도저히 믿을 수 없어 고개를 저어야 했다. 완전히 장님이 돼야 했었는데 왜 오른쪽 눈의 시력이 보존되어 있었을까? 왜 여전히 조리 있게 말하고 글을 쓸 수 있을까? 왜 뇌사 상태에 있지 않을까? 내 왼쪽 눈만으로도 완벽하게 수업 과제를 쓸 수 있다. 아직도 내가 왼쪽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적이다. 안과 의사가 제거하려던 계획이, 사고 다음날 부모님이 도착할 때까지 미뤄졌다. 형은 무릎을 꿇고 울면서 눈을 남겨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했다. 한 번 더 눈을 살펴본 안과 의사의 대답은 단지 부모님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의사는 "실제로 꼭 제거할 필요는 없다"라며 "파열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너무 심오해서 허구인 것 같지만 사실이다. 엄마는 이 일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나는 지금도 가슴이 벅차다. 하나님이 내 사고를 일으키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몹시 싫지만(나는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고가 일어난 후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개입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나는 너무 성급하게 초자연적인 개입을 들이대는 것이 두렵지만 내가 사고를 당했을 때, 멈춰서서 내 전화기를 들고 형에게 전화를 걸었던 그 행인처럼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는 아무래도 기적적인 자극을 받은 것 같다. 그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행인의 이름)은 오데사에서 사업을 경영하고 있었고, 911은 이미 신고되어 있었다. 오직 선량함만이 그가 내 전화기를 집어 들어 형에게 전화를 걸게 시켰다. 또 그는 자기 일을 버려두고 구급차를 따라 메디컬 센터 병원으로 가서 우리 부모님이 도착할 때까지 내 자리를 지켜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의 행동이 나의 왼쪽 눈을 살렸다. 그 당시 비록 볼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내 눈이었고, 지금 이 시점에서, 그때 왼쪽 눈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면 믿지 못할 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팍스 힐에서 내가 보았듯, 내게는 두 가지 분명한 선택이 있었다. 다시 텍사스로 떠나 자원봉사를 재개하거나, 성경에서 읽었던 계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 개인 재산과 남은 몇 가지 소지품을 브루더호프에 기부하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내 생각은 초자연적으로 흘러갔다. 어떻게 나의 경험을 하나님의 인도로 해석하지 않을 수 있을까? 5년이라고 생각하고 떠난 지 5개월 만에 브루더호프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되었을까? 공동체에 가입해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교회가 해준 모든 일을 생각하면 생각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내 인생을 바칠 수 있는 더 유익한 일은 생각할 수 없었다.

브루더호프는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아는 단 한 명의 구성원도 그것을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공동체를 떠나기 전에 내게 환멸을 느끼게 했던 분위기들은 여전히 있다. 그러나 모든 개인이 건강, 능력, 재능, 나이와 관계없이 그토록 훌륭하고 가치 있게 여김 받는 교회는 가장 진정한 기독교의 구현으로 보인다. 브루더호프는 예수의 가장 어려운 가르침을 변함없이 고수하려고 한다. "네가 가진 것을 팔아... 나를 따라오너라"( 19:21). 미래에,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을 위해 전통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한다면, 우리는 변화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도날드 볼러는 최근 뉴욕 할렘 공동체로 옮겨갔다. 온갖 야외 활동을 즐기지만 다양한 문화가 한데 모인 도시에서 수많은 친구들을 만나며 평생 여기서 살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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